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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인류가 만든 馬 자전거의 역사] VII. 격동의 20세기 초반|작성자 자갤화석
대유행기 이후의 대중화
19세기 말 세이프티 바이시클과 공기주입 타이어가 발명되면서 마침내 사료가 필요없는 '말'이 완성되었다.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탈 수 있고 빠르고 멀리 편하게 갈 수 있었다. 얼마안가 내연기관이 탑재된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나오면서(이건 사료(연료)가 필요하구나) 자전거 대유행이 끝났다는게 함정
대유행기가 끝나면서 자전거 가격은 점점 내려가게 되었다. 하이휠 자전거 가격이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했을 때 로버형 세이프티가 등장하면서 가격이 반등했고 얼마후 세이프티가 가격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공기타이어가 등장하면서 다시 반등했다. 다음엔 어떤 신기술이 나올까 기대했지만 이후 이렇다 할 신기술은 나오지 않아 가격은 점진적으로 떨어져 19세기 후반 대당 100달러였던 자전거가 20세기 들어서 25달러에서 안정세를 유지했다.(미국의 경우인데 유럽도 큰 차이는 없었을 듯) 결국 메이커들은 주문생산 위주에서 생산원가를 절감할 수 있는 규모의 경제에 의한 대량생산체제로 접어들었고(이게 안되는 업체들은 알아서 도태) 그래서 주요 수요층이 상류층에서 중산층, 서민층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1913년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은 프랑스의 자전거 보유대수가 300만대에 달하며 10년전 프랑스인 30명 중 1명꼴의 자전거 보급률이 이때 13명 중 1명꼴로 늘어났다고 했다.
1930년 코펜하겐의 한 연구에선 유럽인구의 1/3이 자전거를 이용했고 29%는 전차(電車), 21%는 보행, 나머지는 자동차나 다른 수단을 이용했다고 하며 1933년 [포천]지는 유럽의 자전거 이용자의 95%가 노동자들이며 이들은 자전거가 어린이들이 타기엔 너무 비싼 물건이라고 생각하다고 하며 자전거:자동차 비율이 미국은 1:17인데 반해 유럽은 7:1이라는 놀라운 대비를 보여줬다. (1930년대 미국은 포드의 T모델로 이미 자동차 대중화가 이루어진 시기였고 자전거는 어린이들의 탈것으로 바뀐지 오래였다. 역시 천조국은 스케일이 달라 ㅎㄷㄷㄷ
1930년대 영국과 독일은 각각 연간 200만대의 자전거를 생산했고 독일의 경우 보유량이 1,500만대, 영국과 프랑스가 각각 700만대였으며 이탈리아가 400만대, 인구가 적은 편인 네덜란드도 300만대의 자전거를 보유했다. 신흥 자전거 및 부품 생산국으로 떠오른 일본의 경우도 보유량이 600만대로 인구가 두배인 미국보다 많았다.(미국의 보유량은 2~300만대정도인데 그 이유가 미국은 이때 이미 자동차왕국) 중국의 농민들도 더이상 당나귀를 타지 않고 영국, 독일, 일본 등에서 수입된 자전거를 타고다녔다.
프리휠과 브레이크의 등장
기술적 혁신의 중단이 가격을 떨어뜨렸다곤 하지만 그렇다고 혁신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19세기 말까지 자전거의 개발방향은 경량화에 초점이 맞춰졌지만 20세기 들어 그 한계에 도달하자 다른 방향의 기술개발이 이루어졌다.(2000년까지 휴대폰의 소형화가 진행되었지만 그 한계에 부딛히자(너무 작아지면 불편함) 소형화가 중단되는 대신 기능이 점점 좋아지고 결국 스마트폰으로 진화한 케이스와 비슷하다고 보면 되겠다.)
20세기 초에 나온 대표적인 혁신품 중 하나가 프리휠이었는데
한쪽 방향으로 축을 돌리면 휠이 같이 돌아가는데 반대쪽으로 돌리면 휠이 안돌고 축만 헛돌게 만든 것이다.
이건 대단히 놀라운 발명품으로 오늘날 우리가 자전거를 타면서 일정속도로 가속한 후 페달링을 하지 않아도 자전거가 관성에 의해 순항하는것, 내리막길에서 페달링하지 않고 브레이크만으로 편하게 제어하면서 내려갈 수 있는 이유가 바로 프리휠 덕분이다.
페달링만으로 속도를 제어할 수 있었던 픽시와 달리 프리휠의 적용은 필연적으로 별도의 추가적인 브레이크 장치를 필요로 했다. (당시 대부분의 자전거 매니아들은 프리휠의 적용을 달가워하지 않았는데 프리휠 자체와 추가적인 브레이크 장착으로 인한 중량의 증가를 싫어했다고 한다. 하지만 프리휠의 편리함은 곧 대중들에게 매력으로 자리잡았다.)
미국에서는 주로 이런 코스터브레이크장치가 쓰였다. 주행중 페달링을 멈추면 프리휠이 작동하고 페달을 뒤로 돌리면 브레이크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반면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선 손으로 작동되는 림브레이크가 쓰였다. 처음에는 뒷바퀴에만 적용되다가 점차 앞바퀴에도 적용되어 제동력에서 뒷바퀴만 작동가능한 코스터브레이크를 능가하게 되었다.(제동을 가하면 하중이 앞으로 쏠리는 모든 운송기구의 특성상 앞바퀴의 제동력이 뒷바퀴보다 훨씬 좋다)
변속기의 탄생
자전거가 항상 평탄한 길만 가는 것은 아니다. 평지를 주행하기도 하고 오르막길을 만나기도 한다.
평지에서 잘 달리던 자전거도 오르막을 만나면 페달링 속도(케이던스)가 떨어지게 되고 결국 힘들어 내리게 된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뒷기어를 큰걸 달면 언덕을 쉽게 올라갈 수는 있겠으나 다시 평지에서 속도를 낼 수 없게 된다.
언덕과 평지 모두 쉽고 빠르게 달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변속기는 자전거 라이더의 이런 고민속에서 태어나게 되었다.
1902년 프랭크 보든(Frank Bowden)은 허브내장형 3단 변속기를 발명했다. 영국 노팅엄의 롤리자전거회사(Raleigh Cycle Company)를 운영하던 그는 헨리 스터미(Henry Sturmey)와 제임스 아처(James Archer)를 고용하여 이 제품의 생산을 맡겼다. 최초의 자전거 변속기인 '스터미-아처'가 나온 것이다. (스터미-아처는 2000년까지 롤리 산하에 부서로 있다가 재정난으로 퇴출되었다.)
이 3단 변속기는 엄지손가락으로 핸들에 있는 레버로 조작하게 되어있으며 중속의 기어비가 1:1, 고속기어는 25%증속, 저속기어는 20%감속되는 방식으로(변속비율이 4:3이라 그렇다. 고속:등속=4:3, 등속:저속=4:3) 그 원리는 유성기어방식을 따른다.
허브내장형 변속기가 신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나온지 110년이 훨씬 넘은 물건이다. 오늘날 흔히 보는 디레일러방식의 변속기가 훨씬 나중에 나온 방식이다.
유성기어는 중심의 sun기어, 그것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서너개의 유성(planet)기어, 그리고 외곽의 기어링(gear ring)으로 구성되어있다. 이 기어들이 맞물려가며 변속의 마술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유성기어는 훗날 자동차용 자동변속기에 널리 쓰이게 된다.
자전거 경주와 구동계의 발달
1903년 투르 드 프랑스 우승자 모리스 가린(Maurice Garin). 이때 경주용 자전거에는 이미 드롭핸들바가 쓰였다.
1903년 수일동안 프랑스 전역을 일주하는 레이스 투르 드 프랑스(Tour de Francd)가 처음으로 열렸다. 자전거 경주는 그 이전에도 수없이 열렸지만 투르 드 프랑스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세계 최고, 최대규모의 사이클대회로 성장했으며 100년이 넘는 세월동안 선수들의 기량은 물론 자전거산업 기술 경쟁의 무대와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자전거의 신기술은 오늘날까지 경주용자전거 -> 고급자전거 -> 일반자전거 순으로 전래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1913년, 루시앵 프티 브로통(Lucien Petit-Breton 1882~1917)이 스터미아처의 허브내장형 3단 변속기가 달린 자전거를 타고 투르 드 프랑스에 출전했다. 당시 최첨단의 자전거를 타고 나왔지만 성적이 썩 좋진 않았다. 당시만 해도 변속기의 성능이 중량의 증가를 상쇄할만큼 좋지 못했기 때문에 선수들 사이에서 그다지 선호되지 못했다. 그나마 자전거경주에선 곧 변속기 사용이 금지됐고 투르 드 프랑스에선 1937년까지 변속기를 쓰지 못했다.
원시적인 디레일러형 변속기가 달린 1930년대 경주용 로드바이크. 변속을 위해 손을 체인링까지 뻗어야 했으니 그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겠지만 그래도 코스변화때마다 바퀴 전체를 바꾸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물론 당시엔 노면상태가 매우 불량했으니 변속기가 있어도 경기중 바퀴를 갈아끼워야 할 상황이 많았다. 그래서 캄파뇰로(Capagnolo)는 1930년대 초, 퀵릴리즈(Quick Release)를 개발한다.
캄파뇰로의 퀵릴리즈가 장착된 프론트 허브.
캄파뇰로는 QR뿐 아니라 보다 간편하게 변속할 수 있는 변속기의 개발에도 박차를 가했다.
이태리에 캄파뇰로가 있다면 프랑스엔 셍플렉스(Simplex)가 있었다. 셍플렉스는 스프링이 달린 디레일러장치로 변속시 페달을 뒤로 돌려야 하는 기존 디레일러의 번거로움을 해결했다. 셍플렉스란 이름의 제품은 1928년 처음 나왔지만 본격적으로 쓰인건 레이스에 변속기가 허용된 1930년대 후반이었으며 이때 벌써 5단 변속기가 나왔다.(1950년대 초엔 앞디레일러가 개발되었다. 이로써 기존의 5단 기어가 10단으로 뛰어올랐다.)
시마노의 탄생
1921년 쇼자부로 시마노가 시마노 제철(Shimano Iron works)이란 철공소를 설립했다. 철공소로 시작했지만 곧 자전거부품을 만들었다. 당시만 해도 기술력이 유럽이나 미국만 못했기 때문에 변속기가 아닌 1단 프리휠만 만들었지만 특유의 정교함으로 일본 내수시장에서 인정받았고 수출도 하게 되었다. 프랑스의 셍플렉스, 이태리의 캄파뇰로가 시마노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고 훗날 세계 최대 자전거 부품회사로 성장하게 된다.
비록 UCI의 인정을 받지 못해 아직도 비주류에 머물고 있는 리컴번트도 이미 1930년대에 나와 놀라운 성능을 자랑했으며(리컴번트가 허용되어 주류로 들어왔다면 자전거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르겠지만 아마 엄청나게 달라졌을것이다.) 브레이크, 변속기 등으로 오늘날 자전거의 형태를 확립한 것도 이 시기다.
20세기 초 우리나라에선
1903년 대한제국정부에서 업무용 자전거 100대를 구입, 경찰과 군대에서 순찰, 연락용으로 사용했다.
1905년 밤에 등불없이 자전거를 탈 수 없다는 규정이 생기고 교통경찰이 등장할 정도로 이용자가 많아졌다. 1906년에는 자전거에 세금을 매기기 시작했다. 이제 한국에서도 자전거는 더이상 신기한 물건이 아니었다.
자전거경주는 1906년 4월 22일 동대문 근처에서 열렸다고 하며 이후 자전거 판매상과 신문사의 후원으로 매년 전국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대회를 열었다. 물론 투르 드 프랑스같은 도로경기가 아닌 트랙경기였다.
일제강점기인 1913년 '전 조선 자전거 대경주회'가 열리면서 본격 인기스포츠로 자리잡았는데 이 대회를 보려 용산에 10만명의 인파가 몰리기도 했다.
우리의 사이클영웅 엄복동과 그가 탔던 자전거.
이때 떠오른 스타는 다름아닌 엄복동(1892~1951). 엄복동선수가 수많은 일본선수들을 따돌리고 우승할 때 나라잃은 식민지 조선인들은 자기일처럼 기뻐하고 열광했다고 한다. 오늘날 각종 한일 스포츠전의 원조? 1921년 중국 창춘에서 열린 경기에선 러시아, 중국, 일본선수들을 제치고 우승, 1922년 전조선 자전거 경주대회에서도 우승했다. 그 해는 안창남이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비행기를 몰고 서울하늘을 날았는데 이때 "쳐다보니 안창남, 굽어보니 엄복동"이란 말이 유행했다.
얼마 후엔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친숙한 자전거 동요가 만들어졌다.
자전거 (1933)
작사: 목일신
작곡: 김대현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
자전거가 나갑니다 따르르르릉
저기가는 저사람 조심하세요
어물어물 하다가는 큰일납니다.
따르릉 따르릉 이자전거는
울아버지 장에갔다 돌아오실때
꼬부랑 꼬부랑 고개를 넘어
비탈길로 스르르르 타고온다오
to be continued
참고서적
-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두바퀴 탈것 데이비드 V 헐리히 著 / 김인혜 易 [알마]
- 자전거의 역사 프란체스코 바로니 著 / 문희경 易 [예담]
- 달리는 개화차 자전거 정하섭 著 [보림출판사]
- 시마노 이야기 야마구치 가즈유키 著 / 손은환,강지운 易 [엘빅미디어]
- 파워 산악자전거 정상섭 著 [삼호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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